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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연주회

[2018.01.11]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by 내마음의별 2018. 1. 17.

 작년 10월에 미리 예매를 해 두었던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가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깜빡 잊을 정도로 길었던 기다림의 기간 때문이었을까, 당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티켓을 손에 넣기 위해 긴장하던 마음과 예매에 성공했을 때의 들뜬 기분은 놀랄만큼 담담하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리사이틀 당일, 이른 저녁에 서울 시내의 차가 막힐 것을 염려하여 보다 많이 여유를 두고 예술의 전당으로 출발했다.


 꽤나 일찍 도착하여 여유롭게 티켓을 수령한 후 남은 시간 동안 뭘 좀 먹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카페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런데 예술의 전당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아 앉을 만한 자리를 단 한 곳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우연히 눈에 띈 이마트24 편의점에 들어가 빵과 우유를 사서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먹었다. 공연 시간이 다가와 콘서트홀 로비로 돌아가보니 사람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잠시 후 입장이 시작되었고 나는 자리에 앉아 프로그램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베토벤 (L.v. Beethoven) 1770-1827


피아노 소나타 8번 Op. 13 <비창> (Piano Sonata No. 8 in C minor, Op. 13 <Pathetique>)

Ⅰ. 장중하고 느리게 - 매우 빠르고 생기있게 (Grave - Allegro di molto e con brio)

Ⅱ. 느리게 노래하듯이 (Adagio cantabille)

Ⅲ. 론도: 빠르게 (Rondo: Allegro)


피아노 소나타 30번 Op. 109 (Piano Sonata No. 30 in E major, Op. 109)

Ⅰ. 대단히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 느리게 감정을 담아서 (Vivace ma non troppo - Adagio espressivo)

Ⅱ. 매우 빠르게 (Prestissimo)

Ⅲ. 노래하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을 지니고 (Gesangvoll, mit innigster Empfindung)


중간 휴식 (INTERMISSION)


드뷔시 (C. Debussy) 1862-1918


영상 2집 (Images Book 2)

Ⅰ.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 (Cloches a travers les feuilles)

Ⅱ.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 (Et la lune descend sur le temple qui fut)

Ⅲ. 금빛 물고기 (Poissons d'or)

쇼팽 (F. Chopin) 1810-1849


피아노 소나타 3번 Op. 58 (Piano Sonata No. 3 in B minor, Op. 58)

Ⅰ. 빠르고 경쾌하면서도 장중하게 (Allegro maestoso)

Ⅱ. 스케르초: 매우 빠르게 (Scherzo: Molto vivace)

Ⅲ. 매우 느리게 (Largo)

Ⅳ. 피날레: 매우 빠르지만 지나치지 않게 (Finale: Presto non tanto)


 베토벤의 유명한 비창 소나타로 시작하여 내가 좋아하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으로 끝을 맺는, 썩 마음에 드는 구성이었다. 8시가 지나자 조명이 어두워지며 피아노에 집중되었다. 이윽고, 조성진이 걸어 나왔다. 그는 그를 크게 반겨주는 박수소리를 맞이하며 앞쪽, 뒤쪽을 향해 간결하게 인사를 한 뒤 피아노에 앉았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피아노 건반을 한 번 훑은 다음 짧은 여운을 남기고는 곧바로 무겁고 울림이 있는 비창 소나타의 첫 음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아-, 어색한 소리. 음악회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연주의 첫머리에 듣는 악기의 낯선 소리란 참 묘하다. 내가 진짜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구나. 실황인데 왠지 모르게 실감이 안 나는 그 이상한 느낌은 비창 소나타의 격렬한 1악장이 끝나도록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악장이 끝나자마자 박수를 방불케 하는 기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올 겨울에 유난히 기승을 부린 감기의 위력을 몹시 실감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비창 소나타의 달콤한 2악장이 끝난 후 기침소리가 채 잦아들기 전에 3악장이 시작되었고, 연주를 들으면서 새삼스레 나도 이 곡을 연습해서 쳐 보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뒤따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0번은 나에게 익숙지 않은 곡이었는데, 이는 내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를 항상 어렵고 복잡한 것으로 치부하여 자주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마음 편히 들어나보자는 생각으로 감상에 임했는데 꽤나 매력적인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휴식 시간에는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기가 귀찮아서 혈액순환을 위해 제자리에서 잠깐 일어났다 다시 앉았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홀로 놓인 피아노를 보면서 피아니스트로서 갖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만일 내가 피아니스트라면 수백 명, 아니 천 명이 넘는 관객들이 숨죽여 듣는 가운데서 과연 멋진 연주를 선보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에 관해서 말이다. 뭐,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적어도 조성진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본인이 피아니스트란 직업이 잘 맞는다고 이야기 했으니까.


 2부의 시작은 드뷔시, 드뷔시 연주를 듣는 순간 피아노 소리랑 정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베토벤 소나타를 들었을 때의 어색한 느낌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이미 이 연주회에 충분히 적응했거나, 드뷔시의 음악의 특성상 이미지화가 잘 돼서 그렇게 느껴진 것 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드뷔시는 생각보다 금방 흘러갔고 금세 리사이틀의 마지막 프로그램, 대망의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이 연주되고 있었다. 쇼팽의 풍부한 상상력과 악상이 웅대한 스케일로 녹아 있는 이 곡이, 리사이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의 휘몰아치는 듯한 4악장이 끝나자마자 박수갈채가 물밀듯 쏟아져 나와 프로그램의 끝을 알렸다. 남은 건 앙코르, 청중의 환호는 끊이지 않았고 조성진은 다시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런데 어? 무겁게 울리는 C음으로 시작되는 이 곡은 다름 아닌 쇼팽의 발라드 1번... 앙코르로 쇼팽 발라드 1번이라니, 오늘의 리사이틀에는 여한이 없다 생각했다. 후반부에 가서 눈에 띄는 실수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곡이 끝난 뒤 열렬한 박수가 이어졌고 조성진은 다시금 피아노에 앉아 2번째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응? 쇼팽의 발라드 2번? 이게 도대체 무슨일인가 했다. 그리고 나의 놀라움과 기대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어진 3번째 앙코르 곡은 쇼팽 발라드 3번... 나는 순간 나를 잠시 의심했다. 프로그램에 3부가 있었나? 프로그램북을 펼쳐 보았고, 그런 건 없었다. 그렇다. 이건 조성진의 깜짝 선물과도 같은 것.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앙코르 곡으로 쇼팽의 발라드 4개를 모두 연주했고 나는 마지막에 자리에서 일어나 만족감과 고마움을 가득 담아 박수를 보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 됐다. 콘서트 홀 밖으로 나와 보니 웬 사람들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알고 보니 조성진 사인회 줄이었다. 아아, 그제서야 마지막 앙코르 연주가 끝나자마자 왜 사람들이 박수와 마지막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앞다투어 밖으로 뛰쳐 나갔는지 이해가 갔다.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은 데다가 줄도 지나치게 길었기 때문에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예술의 전당을 빠져나왔다.


 내성적이라는 본인의 말과는 달리, 조성진은 피아노 앞에서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는 피아니스트였다. 훌륭한 연주, 겸손한 자신감, 끝내주는 팬서비스까지 어느 곳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그였다. 여러모로 많은 것을 느꼈고, 생각했다. 그간 마음 한켠에 있었던 갈증도 해소되었다. 언젠가 또 때가 되면 그의 연주를 볼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 ・ ・


 피아노 리사이틀은 1월 11일에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리뷰는 17일에 쓰게 되었다. 요즈음 할 일이 많아서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될 것 같다. 마음만 저만치 앞서 있다.




※ 이 글은 2018년 1월 17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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